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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Republic of South Africa

제목 남아공의 역사

남아공의 역사 (History of South Africa)


 

1. 선사시대

남아공에 근대 인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약 10만 년 전이며, 초기 인류의 시작은 약 3백3십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스터크폰테인 동굴로 이곳은 '인류의 요람'으로 불린다.

최근에 발견된 초기 인류의 자취로는 당시 사냥이나 채집을 하며 살던 코이코이인이나 샌족의 조상인 석기시대 인들의

암벽화를 들 수 있다. 약 2,000 년 전 (초기 유럽 정착인들이 호텐토츠로 부르던 ) 코이코이인들은 대부분 해안을 따라 자리를

잡고 유목 생활을 해왔다. 반면 (흔히 부시맨으로 알려진 ) 샌족은 전역에 퍼져 사냥이나 채집을 하며 살았다.

그들 모두 유럽의 뱃사람들이 이곳에 와 역사를 글로 남기기 수천 년 전부터 이곳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의 주인이었다.

그 당시 농경 및 유목 생활을 하고 반투어를 사용하던 아프리카 민족이 남부 아프리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동쪽의

저지대에서 산악지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곳 유적지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정치 및 문명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크루거 국립공원 북쪽의 툴라멜라 유적지에서는 13 세기경 문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중국의 유적이

발견된 마풍구베 지역은 약 12 세기경의 대규모 무역 중심지의 자취가 남아있다. 농경과 유목으로 생활하던 이들은 남부로

이동하면서 철기 시대 문화와 함께 발달된 사회 정치 제도를 이 지역에 소개하였다.

 

2. 유럽인과의 만남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남부에 처음 정착한 곳은 케이프타운의 테이블만(Table Bay)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곳에

기항지를 건설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에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점차 네덜란드 농민들이 이주하여

이곳에서 직접 농사를 짓게 되면서 영토가 확대되었다. 본격적인 식민지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동부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동인도 등지에서 노예를 데려왔다.


3. 갈등의 시작

1770년대부터 유럽의 이주민들과 케이프타운 동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곳에 사는 반투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부족간의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이는 불가피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약 백여 년 간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고, 유럽의

침략자들은 코사어를 쓰는 부족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 확대하게 되었다. 이 당시 식민지 세력권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는

국가 건설의 노력이 싹트고 있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식 줄루 왕국이 탄생하였다. 1820 년 경 줄루 왕조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샤카 대왕은 아프리카 동남부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샤카왕의 줄루 왕국에서 분파한 무리들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 했고 이 과정에서 큰 분열을 겪게 된다. 다른 아프리카 민족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족 국가를 설립하게 되는데, 모슈슈의 레소토 그리고 소토 - 츠와나 부족 국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남아공

하이펠트 지역 즉 고지대에서 발발한 민족 간의 분쟁으로 인해 1830 년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가던 네덜란드계 정착민들의

후손인 보어의 '부어트렉커'의 이동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4. 침략의 시대

1806년 영국은 케이프 지역을 다시 식민지로 점령하였다. 식민지가 점점 번성하면서 다양한 인종의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었고 1838년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1800 년대에는 유럽의 영향력은 점차 동부로 팽창하였고, 더반 항에서 부터

북쪽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기 시작한 나탈 주의 정착민들은 줄루 영토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1800 년대 중반

부어트렉커들은 내륙에 위치한 백인 통치지역인 트란스바알과 오렌지프리스테이트를 합병하였다. 

 

5. 금과 다이아몬드의 발견

1860년 경 케이프 지역 북쪽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킴벌리로 몰려왔고, 1871년 영국은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지역을 식민지로 합병하였다. 각각의 아프리카 민족들도 하나 둘씩 영국의 지배하에 속하게 되었고

식민지로 통합되는데, 1879년 줄루 전쟁의 경우 매우 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결국 줄루 왕국은 대영 제국에 무룹을 꿇게

되지만 줄루 왕 세츠와요가 이끄는 용맹한 전투부대 “impis”는 이샌들라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으로 유명하다. 1886년 비트바터스란드(Witwatersrand) 금광 지대의 발견은 남아공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은 새로운 금광 지대에 대한 영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에게 주어지는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이를 핑계삼아

1899년 영국은 트란스바알과 오렌지 프리 스테이트와의 전쟁을 벌인다. 전쟁 초기에 보어인들이 영국군을 격퇴하며

승전을 거듭하였지만 대영 제국의 군대는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단지 게릴라 급 전력을 가진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마침내

1902년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 영국의 식민지 초토화 작전으로 농가는 붙태워지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보어인 여성과

어린이들 약 26,000여명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 동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종 별 분리 수용된 캠프에서 혼혈인을

비롯 흑인을 감금했었던 사실이 최근에 와서야 밝혀졌다.


6. 아파르트헤이트

 

⒜ 백인 중심의 정부 설립과 이에 대한 반발
1910년 케이프지역과 나탈, 트란스바알과 프리스테이트를 통합한 백인 중심의 남아프리카연방이 세워졌다. 이에 대한

흑인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으로 1912년 흑인들은 아프리카국가회의(ANC)를 출범시키고, 흑인을 배제하는 정권에 대한

항거로 이어졌다. 1921년 무력투쟁이 고조되어 갈 무렵 남아공의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인종차별적인 정권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어지는 과정에서 1913년 '원주민 토지 법(Native Land Act)'이 제정되었다. 이는 흑인이 선조 때부터 소유한 땅

이외의 땅을 파악하여 나머지 땅을 백인들이 차지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당시 ‘홈랜드’로 불리는 흑인 소유의 땅은 남아공

전체 토지 면적의 약 13% 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백인들에게 특혜를 주는 고용 관련법과 케이프 지역의 혼혈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등의 차별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한편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실업이 증가하면서

아프리카너들의 국수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 아파르트헤이트의 탄생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프리카너 중심의 국민당(NP)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1948년 남아공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제도가 탄생하였다. 이는 과거의 인종차별 정책보다 더 심하고 독재적인 방법을 채택하였다. 남아공의 백인 중심 정권의

권력이 강화되자 흑인 반대파도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1943년 젊은 세대로 이루어진 정치 세력이 등장하여 ANC

청년 연합을 설립하게 된다. 이를 통해 넬슨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등 ANC 를 이끌 차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 민주화 운동의 탄압

1961년 HF 벌보어드 총리가 이끄는 남아공의 국민당 정권은 백인만의 국민 투표에서 승리한 뒤 남아공을 공화국으로

선포한다. 새 정권의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새로 재정된 법에 드러나 있었다. 다른 인종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비롯하여 주민 등록에 있어서 모든 남아공인들은 특정 인종에 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 등이 포함되었다.

거주 지역에 대한 차별도 이루어졌다. 마을 주민 전체를 유색 인종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조치도 시행되었다.

 

⒟ 분리 발전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음에도,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분리 발전 정책을 고안해 내어 각 아프리카

민족을 임의적으로 민족 '국가'로 분리하고, 각각의 '홈랜드'를 지정함으로써 말뿐인 '독립'을 보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상 지방의 토지는 이미 인구 과밀화 현상과 경작 남용 등으로 땅이 황폐화되었다. 백인 거주 지역에서 강제 이주된

흑인 및 유색 인종의 수는 약 350만 명에 달하며 홈랜드로 불리는 지방 마을에서는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통행법과

주민 수 제한 등의 규정이 더욱 확대되어 엄격히 적용되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행되면서

1949년 ANC는 행동계획에 착수하는데, 이는 재정비된 1940년대의 무장 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행동계획은 백인 정권의 지배를 거부하고, 항의와 파업, 시위 등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 저항의 시기

1955년 소웨토 의회에서는 자유의 헌장이 낭독되었다. 이 선언문에서는 이때까지의 투쟁을 인권과 반 인종차별의

문화로 묶는 투쟁의 원칙을 발표하였다. 얼마 후 정부는 ANC와 PAC등의 대규모 조직 활동을 금지하였다.

한편 1960년 샤프빌에서 통행법에 반대하던 시위자 69명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면서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재판 없이 구속이 가능해졌다.

 

⒡ 자유를 위한 투쟁 

흑인 정치 조직의 지도자들은 이 당시 모두 체포되었거나 망명 중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ANC와 PAC는 오랜 기간

고수해온 비폭력 저항 노선을 포기하고 독립을 쟁취한 이웃 국가들에 기반을 두고 무장 투쟁에 나섰다.  국가 내에 머물고

있던 ANC의 새로 창설된 무장 세력인 <음콘토 위 시즈웨(국가의 창)> 소속의 최고 지도자 등은 1963 년 정부에 체포되었다.

악명 높은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를 포함한 8명의 ANC 지도자들은 (본래 기소된 ‘ 반역 ’ 혐의가 아닌) 국가 전복을

기도한 죄로 종신형을 언도 받는다. 1960년대 내내 반대파의 무력행동을 제압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들이 행하여졌지만

1970년대 초 부활하기 시작한 저항 운동은 거센 움직임을 보였다. 1976년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지속적인 항거를 위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 해 6월 소웨토의 초등학교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발하여,

이는 전국적인 어린 세대의 봉기로 이어졌다. 민주화 세력은 단호한 법적인 방법을 통해 국가와 맞섰지만

이에 대해 정부의 유일한 대책은 극단적인 억압뿐이었다.

 

⒢ 개혁 조치

엄청난 규모의 시위와 항거 에 당황하게 된 백인 정부는 1980년대 초에 들어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일례로 흑인 노조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1983년 개헌을 통해 소수 민족인 컬러드와 인도인의 하원 참여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이에 대한 지지는 미약하였다. 1986년 원성 높았던 통행법이 마침내 폐지되었고,

이 시기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국제 사회의 압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 아파르트헤이트의 마지막

1990 년 2 월 당선된 FW 드 클러크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해금 조치를 취하고 유명한 만델라 등의 인사를 포함,

흑인 정치인들을 석방시켰다.

 

7. 민주주의의 탄생

오랜 협상을 통해 마침내 남아공은 임시 헌법 하에 1994년 4월 첫 민주화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ANC는 62%의 지지를

획득하며 다수당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남아공은 다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하였다. 4개의 주와 10개의 홈랜드로

구획이 나뉘었던 남아공은 9개 주로 새롭게 태어났다. 임시 헌법에 의하면 국민당과 잉카타 자유당은 남아공의 첫 민주화

선거로 선출된 만델라 대통령 하의 국가 통합 정부에 참여하도록 되었다. ANC가 이끄는 정부는 국가 및 제도의 재건과

개발을 도모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1999년 치러진 두 번째 민주화 선거에서 ANC에 대한 지지는 더욱

상승하여 전체 투표수의 2/3 를 차지하게 된다. 남아공은 새 대통령 타보 음베키의 지휘 하에 만델라 후기 체제를 출범한다.

 2004년 4월 14일 열린 세 번째 선거에서 ANC는 69.7%에 해당하는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2004년 4월 27일

열린 대통령 취임식은 남아공 민주화 10주년 기념일과 맞물려 더욱 뜻 깊은 행사를 가졌다.

2010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을 아프리카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순조롭게 하였다